젊은 ‘재벌 3金’으로 불려
건설·석유·증권으로 사업확장
재계 6위 달성하며 성공가도
쌍용차 실패로 그룹까지 해체
국회의원·스카우트지원재단 의장 역임
쌍용그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석원 전 회장이 26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재계와 성곡언론문화재단에 따르면 김석원 전 회장은 이날 새벽 3시께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전 회장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1945년 대구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는 서울(서울고)에서, 대학은 미국(브랜다이스대 경제학과)서 나왔다.
그는 유학중이던 1975년 부친인 김성곤 회장이 타계하면서 29세에 불과한 나이에 그룹을 물려받았다. 당시 재계에서는 김석원 전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김현철 삼미그룹을 회장을 묶어 ‘재벌가의 3김’으로 불렀다. 젊은 나이에 그룹을 물려받은 김씨 성을 가진 2세 경영인이란 공통점 때문이었다.
특히 쌍용은 재계 6위(자산 기준)에 오를 정도로 성장하면서 김석원 전 회장은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취임 후 처음 10여년간 김 전 회장은 쌍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기존 시멘트 사업(쌍용양회·현 쌍용C&E) 확장은 물론이고 쌍용중공업(현 STX)·쌍용종합건설을 설립하면서 건설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또 이란국영석유공사와 합작해 한이석유(현 에쓰오일)를 세우고, 효성그룹으로부터 효성증권(현 신한투자증권)도 인수했다.
미국 유학 시절 레이싱 학교에 다녔고, 포르쉐의 한정판 슈퍼카 모델인 ‘포르쉐 959’의 국내 유일 소유주였을 정도로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86년 동아자동차(쌍용차·현 KG모빌리티)까지 계열사를 두게 됐다. 여기에 리조트(용평리조트)까지 그는 빠르게 사업을 확장했고, 모두 순탄하게 돌아갔다. 그룹 역량을 집중시킨 자동차도 ‘무쏘’와 ‘코란도’로 상징되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인기 덕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자동차가 그룹의 발목을 잡았다. 산업 특성상 막대한 초기 자금이 투입됐으나, 이를 소화할 만큼 국내 자동차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았다. 또 동아차의 강점이었던 상용차와 SUV 생산능력을 키우는 대신, 김석원 전 회장은 스포츠카와 럭셔리 고급 세단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경영전략의 실패로 결국 쌍용차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당시 나머지 계열사들은 모두 흑자를 내고 있었지만, 쌍용차 부채는 이를 모두 갉아먹고도 남을 정도였다.
결국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지고 난 뒤 대우자동차에 회사를 넘기게 되지만, 여전히 그룹서 감당해야 할 부채 규모가 1조8000억원에 달했다. 끝내 이를 해결하지 못한 쌍용그룹은 경영난 타개를 위해 제지·정유·증권 등의 계열사를 매각했으며, 쌍용건설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사실상 그룹이 해체된 것이다.
김석원 전 회장은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선거구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룹이 경영난에 빠지자 2년 만인 1998년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재·보궐선거에서 달성군 지역구를 물려받은 게 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개최된 세계청소년캠프 본부장을 맡아 청소년 국제교류에 기여하고, 2000년부터 2년간 세계스카우트지원재단 의장직을 맡아 한국스카우트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유가족에는 부인 박문순씨, 아들 김지용(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김지명(JJ푸드 시스템 대표)·김지태(태아산업㈜ 부사장)씨가 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른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특1호실. 발인은 29일 오전 7시 20분. 장지는 강원도 용평 선영이다.

매일경제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