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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이럴거면 공공기관장 공모 왜 하나

지면 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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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1997년 11월은 몹시도 을씨년스러웠다. 연초부터 한보·삼미·한라 등 대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무너져갔다. 6·25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아 국가부도를 막아야 하는 정부로서는 돈 되는 건 모두 팔아야 했다. 외환은행을 팔았고, 한국전력공사를 분할 매각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공무원 10%, 공공기관 임직원 20%를 감축하는 구조조정도 추진돼 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한편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정부 개혁이 신속히 추진된 때이기도 했다. 그해 '이사장' 제도 폐지가 포함된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개정도 추진됐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을 개혁안이다. 당시 공기업 이사장은 거의 여당 정치인들 몫이었기 때문이다. 비상임이면서도 상당히 높은 보수를 받고 사무실과 차량을 제공받는 자리여서 다음 선거를 노리는 정치인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기여하는 것도 없으면서 세금만 축내던 자리가 폐지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많은 정책이 그렇듯 의도가 선하다고 결과마저 선한 건 아니다. 요즘 인사를 보면 이사장 제도 폐지는 소탐대실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사장 자리가 없어진 뒤 그전에는 전문가들이 가던 CEO와 감사 자리를 정치인들이 차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셀프 후원으로 사퇴한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을 비롯해 농어촌공사 사장 등 상당수 기관장 자리가 전문성 없는 정치인들로 채워졌다. 국민연금공단처럼 CEO는 정치인, 감사는 업무와 무관한 언론인으로 채워진 기관도 있다. 물론 정치인 출신이라고 무조건 안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통령과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코드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문성도 함께 가지고 있어야 기관이 산다.

또 다른 문제는 이 직위들이 이른바 '공모'를 통해 사람을 뽑는다는 사실이다. 공개모집, 임원추천위원회, 공공기관운영위원회, 소관 부처 장관 제청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직위가 대부분이다. 청와대로선 전문성이 없는 사람을 임명하면서도 절차를 통해 뽑은 사람이라는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어 편리한 제도다. 그러나 특정인을 내정해놓고 절차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공모 제도는 관련된 많은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고 있다. 소관 부처의 차관들은 죽을 맛이다. 청와대 의중을 알아차려야 하고, 그 내정자를 적어도 복수 추천 범위 내에 넣어야 하기 때문에 임추위와 공운위의 많은 위원에게 압박과 회유의 양면전술을 써야 한다. 자칫하면 무능한 차관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공기업 인사담당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청와대 뜻을 거스를 수 없지만 어수룩하게 진행하다가는 내부 게시판이나 외부 언론에 노출돼 혼쭐이 나게 된다. 이런 과정을 잘 아는 민간 위원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최적임자를 추천할 것을 바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모가 진행돼도 진짜 적임자는 시큰둥하고,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만 사전 낙점 인사가 있는지 탐문하기 바쁘다. 대부분의 경우 결국 내정됐던 인사가 후보군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적어도 서너 달, 많게는 6개월을 넘는 경우도 다반사다. 한 번이라도 공모 절차에 관여해본 사람이라면 나라가 이렇게 운영돼도 되나 싶은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하는 얘기다. 차라리 이사장 제도를 부활하자. 코드가 맞는 정치인 출신에게 사무실도 주고 차량도 주고 활동비도 주자. 공모 절차 없이 뽑아서 말이다. 그 대신 CEO나 감사는 정치권이 건드리지 않도록 법제화하자. 언론도 시민단체도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 공모로 치장해 잠재적 범죄자를 양산하는 일을 이제는 그만두자. 이 땅의 정치가 공공기관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고 조금만 뜯어갈 수 있도록 차라리 이사장 제도를 부활하자.

[박수영 아주대 교수·생활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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