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 위해 만든 `여백서원`
독지가들 잇단 희사로 시작
후원통장에 이름 대신 책제목
보석처럼 빛나는 익명 후원자
독지가들 잇단 희사로 시작
후원통장에 이름 대신 책제목
보석처럼 빛나는 익명 후원자
아무리 작아도 극장이니 오시는 분들이 있고, 오시는 분들은 그 판도 본다. 그런데 그걸 본 분들 중에서 낯 모르는 독일의 독지가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정말이지 동화 같은 희사에 희사가 꼬리를 물었다. 어디다 크게 얘기하지도 않았건만 땅을 주시는 분들, 돈을 주시는 분들이 연이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아쉬울 때도 어디다 손 벌려 보지 못하면서 평생 살아온 내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순간이 여럿 있었다. 너무나도 귀한 뜻이 그렇게 저절로 모이는데, 내가 물러설 수는 없어서, 요즘은 아주 작은 숲속 마을을 만드는 일을 차츰차츰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다. 큰 생애 하나가 보는 이에게 선명해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오는 시설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는 아주 작은 숲속 '책 오두막' 몇 채가 그 내용이다. (기부가 이어진다 한들, '마을'을 만들 만큼 모일 리야 없으니, 벽 세우고 지붕만이라도 얹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게 목표이다.)
가끔씩 통장을 볼 때마다 놀라는데, 얼마 전부터는 보낸 이가 누구인지 도무지 짐작이 안 되는 입금내역이 통장에 찍히기 시작했다. 입금자 칸이 '건축의 경험' '타인의 해석' '백년의 고독'-같은 단어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소문해봤으나 그런 이상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누가 알 리 없었다. 며칠 전에야 천사의 자발적인 실토가 있었다.
"통장에 찍힌 것은 제가 읽은 책의 제목들입니다. 그다지 활발히 활동하지도 못하고, 여백서원에 자주 가서 뵙지도 못하지만, 전영애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기여로 더 멋진 공간이 되어 가고 있는 그곳에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자기도 당연히 큰 액수를 쾌척하고 싶지만 그럴 형편은 아닌 만큼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읽은 책의 가격만큼이라도 꾸준히 송금을 해보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직장생활하고, 결혼하고 "어떻게 보면 안정적이고, 어떻게 보면 따분할, 크게 변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는 게 공허하다거나 재미가 없지는 않다"며 20년 전에 들은 수업에서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과 같은 가치를 찾아내는 방법을 터득한" 덕분이라고 썼다.
"헤르만 헤세, 괴테와 같은 독일 작가들뿐만 아니라,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철학자, 케빈 켈리 같은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 같은 역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생물학자들이 이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찾아낸 깊은 의미와 재미를 같이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제가 살아가는 순간들을 감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순간들의 특별한 의미에 감동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여백서원과 같은 공간이 번창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에서, 크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읽은 책 정가만큼이라도 송금하고, 독후감도 쓰려고 합니다."
이렇게 읽힌 책들을 모아 숲속의 작은 '책 오두막' 한 채를 채울 꿈으로, 이즈음 행복하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