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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24시] 국민연금의 `차도살인지계`

지면 A34
사진설명
이달 말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앞두고 정부가 결국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남의 칼을 빌려 상대를 친다)'의 묘안을 냈다.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수탁자책임위원회에 중요 주주권 행사를 맡기고, 민간 자산운용사에 의결권 일부를 위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정부와 국민연금이 갖는 부담을 줄였다. 전면에 나서서 칼을 휘두르기보다는 결정을 민간에 맡기겠다는 모양새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 칼자루가 과연 '민간'에 있는지는 의문이다.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는 여전히 보건복지부 장관과 관계 부처 차관으로 도배돼 있고, 주주권 행사와 관련한 최종 결정도 해당 기구가 맡는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앞두고 전문가 사이에서는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운 조직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이번 논의에서 국민연금 거버넌스 개혁은 쏙 빠졌다. 결국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방안을 들여다본 전직 국민연금 이사장 사이에서는 "결국은 정부가 뒤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겠다는 의미"라는 쓴소리가 나왔다.

특히 국민연금의 대한항공 갑질 사태와 관련한 민간 전문위의 일사불란한 대응은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는가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대한항공에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복지부 장관의 한마디에 민간 자문 기구의 긴급 회의가 소집됐고, 일정을 조율하지 못하겠다는 일부 민간 전문위원이 있었지만 회의는 그대로 진행됐다. 그 직후 나온 우려 표명은 장관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장을 밝히지 않은 위원도 있었지만 공동 명의로 성명서가 나갔다. 한 전문위원은 기자에게 "우리가 장관의 한마디를 위해 들러리를 서고 있는 것 아니냐"는 자조의 목소리를 내놓았다.

물론 기자 역시 기업에 환부가 있다면 주주로서 칼을 쥐고 수술에 나서야 마땅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하지만 정부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다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망나니 칼춤'의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으로 홍역을 치렀던 흑역사를 기억한다면 이제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마련할 때다.

[증권부 = 유준호 기자 yjunho@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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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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