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전8기 역경 뒤집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 이전에도 제기됐고 이후에도 계속 제기돼 온 인류의 물음이다. 부산 <해물왕창칼국수> 박기대(45) 대표에게도 이 물음은 평생 화두였다. 음식을 만들고 장사를 하고 돈을 벌면서도 늘 이 물음은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에겐 종교가 없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연민과 연대가 사람을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은 갖고 있다. 나와 사람들을 이어주는 끈으로서의 식당. 그가 끓인 4000원짜리 해물칼국수는 그래서 결코 저렴하지 않다.
부모님 애태우게 했던 아이, 항공사 입사 뒤 실망해 퇴사 1970년대는 이촌향도의 시대였다. 박 대표의 부모님도 그 대열에 끼었다. 경북 영일(포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1971년에 부산으로 이주했다. 박 대표 부친은 건설노동과 보일러 수리 등으로 가족들을 건사했다. 처음부터 부친이 그런 일에 종사했던 건 아니다. 부산에 정착하자마자 국내 굴지의 제강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남 밑에서 간섭 받으며 일하는 것이 성격에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주 열정적이면서 무엇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다.
부모님 덕분에 그는 부산 주례를 고향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형, 누나에 이어 막내로 태어난 박 대표는 부모님의 근심거리였다. 백일 무렵 다리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염증이 발병했던 것. 의사는 환부가 더 번지기 전에 다리를 잘라내자고 했지만 부모님은 거부했다. 입원할 돈이 없어 통원하며 치료해야 했다. 부모님은 갓난아기를 데리고 하루 7차례 운행하는 버스로 시내 소재 대학병원을 오갔다. 아버지는 근처 하천의 모래를 퍼내 팔아서 막내아들의 병원비를 충당했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염증은 완치됐다. 자칫 평범하지 않은 청소년기를 보낼 뻔했으나 그는 부산의 공립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평범하게 입학하고 졸업했다.
1990년대 초반, 박 대표는 민항기를 운항하는 대기업체에 군특례 대상자로 들어갔다. 입사 하자마자 자신의 미래 모습일 고참 선배들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다. 막 들어온 자신의 업무와 과장급인 고참 선배의 업무가 별 차이 없었던 것. 그렇다고 급여가 두둑했던 것도 아니었다. 5년간의 군특례 의무기간을 채우자마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치 오래 전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1994년 퇴사 직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첫 해외여행을 20일간 다녀왔다. 회사에서 지급받은 항공권을 사용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이 퍽 드물던 시절이었다.
“기대했던 직장생활에 실망해 뭔가 대안을 찾고 싶었어요.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 여행이 제겐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탐색 작업이었습니다.”
마라톤 매력에 빠져 스포츠용품 사업까지 새로 들어간 회사는 국내 최대 재벌의 계열사로 종합전자부품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수원 사업장으로 발령받아 1년 반 근무하다가 부산 자동차 사업장으로 내려왔다. 이전 항공사보다 업무는 적성에 맞았다. 이 때는 무엇보다 마라톤의 매력을 발견하고 그 세계에 푹 빠졌던 시기였다.
1999년 우연한 기회에 유명 언론사 주최 마라톤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발목이 잡혔다. 27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은 마라톤 사이트에서 동호인들과 채팅을 하고 자신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글은 마라톤 동호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고 적잖이 공감도 받았다. 내친김에 ‘부산 오뚜기 마라톤’ 모임을 창립해 총무로 활동했다. 국토종단 릴레이 마라톤 대회에서는 김해-부산 구간을 맡아서 진행하기도 했다. 스케줄 관리, 경찰 에스코트 협조 요청, 언론사 보도자료 작성 등등 일이 많았지만 재미있었다. 사익이 아닌 공익에 봉사했을 때의 뿌듯함을 느꼈다. 당시 서로 순수한 동기로 교분을 맺었던 동호인들은 지금까지도 오래 교류하고 있다.
한편, 자동차에서 전자 분야로 회사 업무가 바뀌자 직장생활에 흥미가 떨어졌다. 2001년 9월에 퇴사했다. 그래도 회사생활에서 성과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사내에서 만나 사랑을 불태웠던 여성과 퇴사 1년 전인 2000년에 혼인을 했던 것.
2002년 봄이 되면서 경남 마산에 유명 스포츠용품 메이커 대리점을 차렸다. 마라톤을 하는 동안 그는 스포츠용품 소비자였다. 나름 스포츠 웨어나 운동화 등에 대한 안목이 있었다. 대리점을 운영하면서도 고객들의 컴플레인이나 의견을 주의 깊게 청취했다. 그는 이런 내용들을 본사에 전달했다. 특히 고객의 니즈와 동떨어진 마라톤운동화에 대해 조언해줬다. 현실적 마케팅 전략 등을 건의하자 본사에서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비쳤다. 본사 임원이기도 했던 사주 아들과 친했으나 점차 소원해졌다. 본사와의 갈등이 쌓이자 5년 만에 대리점 운영을 접었다.
대리점 폐업 후 제 3국을 통해 스포츠용품을 외국에서 들여와 인터넷으로 판매했다. 미국에서 직수입해 지인들에게 스포츠웨어를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표는 상표권자 아니었다. 상표권을 가진 국내 회사의 견제를 받았다. 독점적 구조로 유통하고 싶었는데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환율이 올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내 기술 내 상품으로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 뭘까 고심했다. 결론은 외식업이었다.
상처 안고 떠난 길, 산티아고에서 길을 찾다 2009년 봄 서울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서울에 엄청 장사 잘 되는 삼겹살이 있으니 체인점을 알아보라는 것. 서울로 올라가 확인해 보니 정말 대박집 같았다. 가맹점 계약방법을 물어봤다. 상권은 담당자가 지정해주고 점주는 저녁에 돈만 챙겨 가면 되니 운영에 힘들 게 없다고 했다. 창업비가 4억 원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 말에 혹해서 박 대표는 부친에게 2억씩 투자하자고 제안했다. 아들의 얘기를 듣자마자 부친은 “간도 못 보는 놈이 무슨 식당이냐!”며 일언지하에 잘랐다. ‘나를 당신 노후 자금이나 빼먹는 놈으로 밖에 안 보셨나’ 싶어 그는 마음이 아팠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서야 아버지가 옳았다는 걸 알았다. 그때만 해도 박 대표는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던 것이다.
상심한 그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섰다. 아내에겐 미안했지만 집에는 원양어선 타러 간다고 해두었다. 2009년 9월부터 45일간 1000㎞를 걸었다. 나 자신을 찾고 싶었다. 처음에는 ‘내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져 마음이 무척 아팠다. 두고 온 자녀들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다. 차츰 걷고 또 걸으면서 조금씩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해했다. 한 편으로 돌아보니 자신은 지금껏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고 살았다. 세 아이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명확한 ‘내 자리’를 찾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힘들더라도 내 식당을 차려 떳떳하게 일어서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와 2010년에는 식당에 취직했다. 식당을 하려면 실전 연습이 필요했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처음 해보는 식당 일은 만만치 않았다. 몸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12시간 동안 계속 서있는 것이 힘들었다. 생활정보지를 보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 일 못한다고 6일 만에 쫓겨났다. 그동안의 급여 24만원을 손에 쥐고 뒷문으로 나오는데 설움이 복받쳤다. 버스를 수십 대 보내고 집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애들은 곤히 잠들었고 부인은 고생했다며 그를 반겼다.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시 생활정보지를 뒤졌다. 두 번째 식당부터는 쫓겨나지 않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임했다. 밀면 전문점 창업을 염두에 두고 식당을 알아봤다. 3개월 단위로 식당을 옮겨 다니며 조리비법, 주방기구, 주방구조 등을 익혔다. 레시피를 얻는 게 쉽지 않았다. 조리사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했다. 술도 자주 사주고 점심 반찬도 집에서 마련해 갔더니 조금씩 알려줬다. 하지만 핵심은 양념이었다. 사장이 만들어 통에 담아줘 알 도리가 없었다. 궁리 끝에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냈다. 양념장 만들기 전날, 투입될 예상 양념들의 무게를 모두 저울에 달았다. 다음날 사용한 무게와의 차이를 알아내고 다시 검증하기를 여러 차례 했더니 정확한 수치가 나왔다.
처음 120만원을 받던 급여가 1년 반쯤 지나자 220만원까지 올랐다. 그만큼 일의 숙련도가 높아졌던 것. 하루에 밀가루 10포 이상 분량을 파는 식당에서는 빠른 속도로 작업 하는 방법을 배웠고, 하루 1포도 못 파는 가게에서는 장사가 왜 안 되는지 이해가 갔다. 업소용 레시피도 수십 장 쌓였다. 이 정도면 준비는 끝났다.
첫 식당 운영 성과 컸으나 친구 사고에 또 상처 생각보다 점포 얻는 게 어려웠다. 점포가 포착되면 부모님이 검증했는데 100% 퇴짜였다. 부모님은 박 대표가 보지 못한 부분까지 상세히 꿰뚫었다. 2011년 범일동에 밀면집이 나왔다. 역시 부친에게 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의 부친은 위치, 임차료, 권리금이 괜찮다고 평가했다. 다만 배달하기 힘든 점을 맘에 걸려하셨다.
첫해는 배달 직원들과의 전쟁이었다. 며칠 만에 그만두거나 오토바이 사고를 내고 출근 안 하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면을 뽑다말고 박 대표가 직접 배달을 다녀왔다. 그 사이 홀에는 손님들의 불평불만이 가득 찼다. 그렇게 첫 여름을 보냈다. 밀면 집은 겨울이 비수기다. 비장의 무기였던 해물칼국수와 들깨 칼국수로 겨울 역시 무난히 넘겼다.
이듬해엔 부인에게 밀면 조리법을 가르쳐서 주방으로 들여보내고 박 대표는 배달을 전담했다. 한결 가게가 안정됐다. 홀에서도 줄을 서고 배달도 밀려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매출은 크게 늘었다. 여름 성수기가 끝나자 직원들에게 상여금을 지급하고 가을에는 해외여행도 보내줬다.
비수기로 접어들 무렵 주방실장이 불미스러운 일을 몇 번씩 저질러 내보냈다. 그러던 차에 서울 명문대를 졸업하고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던 친구가 15년 만에 부산으로 귀향해 잠시 쉬고 있었다. 친구에게 식당 일을 요청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하루는 그 친구가 야채조리기를 사용하다 칼날에 손가락이 끼었다. 조작이 서툰 친구는 뚜껑을 닫은 채 무리하게 손가락을 넣었던 것. 그만 손가락이 두 개가 순식간에 절단됐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봉합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치료 경과는 좋았다. 친구와 친구 부모님에게 큰 죄를 진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친구는 오히려 박 대표를 위로해줬다.
그 뒤 며칠 동안 가게 문을 닫았다. 사고 후 밀면은 보기도 싫었다. 마침 부동산중개업소에서도 내놓을 의향이 없냐고 문의가 왔다. 여름 성수기를 앞뒀지만 미련 없이 점포를 넘겼다. 기계 정비, 레시피, 협력업체 등을 목록으로 정리해 인수자에게 인계하고 조리법을 확실히 익히게 해준 뒤 집에 돌아왔다. 2014년 7월 10일이었다.
두 번째 산티아고 다녀와 해물칼국수 식당 열어
마음이 산란해진 박 대표는 다시 산티아고로 향했다. 2차 산티아고 순례길은 두 아들과 함께 갔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이었다. 식당 일로 그간 얼굴 보기도 힘들었는데 24시간 같이 붙어 있으니 행복했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800㎞의 산티아고 순례길과 스페인 남부 지중해 연안까지 걸었다. 끝없이 걸으면서 서로 묻고 답했다.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식당 어떤 메뉴를 해볼까 등등 구체적인 이야기도 나눴다.
산티아고에 다녀와 10월부터 점포를 보러 다녔다. 생활정보지와 동네 부동산중개업소 등에도 좋은 점포를 요청해놓았다. 한 달쯤 지나자 드디어 원했던 조건과 비슷한 점포가 나왔다. 집과 가까우면서 지하철역 입구의 전면이 넓고 주차장 넓은 곳이었다. 부모님도 맘에 든다고 했다. “자금 부족하면 얘기하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하지만 박 대표는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전개할 생각이었다.
2014년 11월 17일 지금의 점포를 임차했다. 중고장터에서 밀면 기계를 비롯한 상태 좋은 장비들을 저가에 구입했다. 간판과 타일은 직접 구입해 붙였다. 전면 벽에는 흰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조각들을 붙여 국수를 연상시키도록 퍼사드를 꾸몄다. 패널공사, 쓰레기 치우기, 하수구 새로 내기, 벽지 바르기, 가스 설비, 전기 가설공사 등을 손수 했더니 비용이 1200만 원 정도 들었다. 박 대표 부부와 부친 등 세 사람은 16일 동안의 강행군 끝에 공사를 마쳤다. 드이어 2014년 12월 5일 <왕창해물칼국수>가 개업일을 맞았다. 밥과 술안주가 되는 해물왕창칼국수 콘셉트였다. 현란한 도우미, 전단지, 현수막 없이 사방 1m가 채 안 되는 작은 간판 하나에 의지한 채 문을 열었다. 박 대표는 두 번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얻은 개달음이 있다. 신의 계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종교가 없는 그에겐 내면화된 일종의 신념들이다. 욕심 부리지 말고 천천히 가자, 길게 보고 멀리 가자, 이웃과 함께 가자,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자. 이 네 가지 신념을 <해물왕창칼국수> 경영에 적용하기로 맘먹었다. 간판 맨 앞에 산티아고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가비를 그려 넣었다.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도록 눈에 띄는 곳에 박아둔 것. 그가 정립한 생각들은 공허한 수사가 아니었다. 평소 자신과 아내에게 “4000원짜리 칼국수지만 4만원의 가치로 팔자”고 되뇐다. 아무리 대기 줄이 길거나 기다리다 돌아가는 손님이 생겨도 혼자 식탁을 차지한 1인 손님에게 자리를 옮겨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게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정성이 통했는지 대박집은 아니어도 식당은 꾸준하고 완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2017 7월 12일에는 KBS-2TV 생생정보 프로그램에 ‘해물칼국수 가격이 4000원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내용으로 방영됐다. 방송이 나간 후 <해물왕창칼국수>의 가치를 알아 본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매출이 한 달에 5000만원을 넘기기도 했다.
‘아너소사이어티’ 클럽 가입하고 통큰 기부 매출 상승은 그만큼 누군가가 기여한 결과다. 박 대표는 직원들의 충분한 휴식을 위해 한 달에 네 번, 매주 화요일을 휴무일로 정했다. 추가적 매출상승보다 ‘길고 멀리’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칼국수를 팔아준 익명의 손님들과 사회에는 통큰 기부로 보답했다. 사랑의 열매 사단법인체인 ‘부산 아너소사이어티’ 기부자 클럽에 고액기부자로 가입한 것. 앞으로 5년간 1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정하고 우선 2000만원을 기부했다. 지난 12월 주요 일간지들은 ‘칼국수 판 돈 모아 1억원 기부할게요’ 등 박 대표의 기부 사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예전에 발달장애 자녀를 둔 동네 선배가 사재 털어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은 게 첫 계기가 됐다. 그 뒤 꾸준히 매달 일정액을 시설과 기관에 지원하고 식사 대접을 실천해왔다. 그래도 1억 원을 쾌척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부인과 아이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자 그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돌아보면 박 대표는 그동안 전자 항공기 자동차 무역에 이어 외식업에 종사하고 있다. 서로 연관이 적은 분야들이다. 그건 어쩌면 그가 태생적으로 나태함이나 매너리즘에 빠지는 걸 경계하는 사람이라는 반증일 수 있다.
“위기의식이 없으면 나태해지는 것 같아요. 기부 약속하고 빚을 지면 스스로 책임의식을 일깨울 수 있겠지요? 지금 가진 돈은 없습니다. 앞으로 오실 손님들이 제 기부금의 담보지요. 약속을 이행하려면 제대로 손님들을 모셔야 할 거고요. 5년 후에 약정한 1억 원 기부가 끝나면 아내를 새로 클럽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싶습니다.”
방송이 나가자 적잖은 창업희망자가 찾아왔다. 대개는 며칠 배우다 힘만 들고 큰돈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그냥 가버렸다. 좀 더 부지런하고 시간을 투자해야 성공하는 업종이라고 말해줘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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