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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Interview] SNS 폴로어 260만…한국문단 대표 밀리언셀러 작가 이외수

지면 A19
대표작 하나 쓰는게 소원…`오행` 바탕으로 철학소설 써볼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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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에서 만난 작가 이외수는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 하면서 소년처럼 참 많이 웃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미화하지 않았고 남을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김재훈 기자]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에서 만난 작가 이외수는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 하면서 소년처럼 참 많이 웃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미화하지 않았고 남을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김재훈 기자]
"계급장 다 떼고 붙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SNS는 평등해." 작가가 왜 그리 열심히 SNS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소설가 이외수(71)가 한 말이다. 그는 천진난만한 복서 같았다. 상대가 누구든 무시하지 않고 진심으로 상대해주는….

작가 이외수는 1970년대 초중반 한국 문학의 축복으로 다가온 작가였다. '꿈꾸는 식물' '들개' 등은 이외수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소설 미학을 보여주었다. 오죽했으면 당대 최고 평론가였던 김현이 "이외수의 소설은 너무나 심하게 나를 고문한다"고 했을까.

문단에 별다른 연이 없는 지역 작가였던 그는 문단 시스템이 아닌 독자들이 원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외친다. 그의 시도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벽오금학도' '괴물' '황금비늘' 등 소설과 산문집들이 연이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의 판매 속도와 더불어 긴 머리에 기행을 일삼던 그의 이야기는 상당 부분 과장된 채 전설처럼 퍼져나갔다.

그는 내친김에 더 본격적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갔다. CF에 등장하기도 하고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기도 했다. 트위터를 비롯한 SNS가 등장하자 이번엔 모바일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지금 거느리고 있는 폴로어 수가 260만명이다.

검열 없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난이 뒤따랐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저런 화제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순진한 측면이 많은 사람이다. 구제역이나, 배추 파동 등으로 강원도 농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홍보대사를 자처해 SNS를 통해 농산물을 '완판'시키는 기록을 세웠다. 어느 작가가 자기가 사는 동네의 배추와 고로쇠 수액을 팔기 위해 '모양 빠지는' 일을 서슴없이 하겠는가. 그 대가로 그가 받은 건 옥수수 몇 자루와 고로쇠 수액 몇 병, 배추 몇 포기가 전부였다.

그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보다 부지런하다. 1972년 등단 이후 지금까지 한시도 거르지 않고 글을 썼다. 초기 대표작 하나 내놓고 평생 작가 행세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성실함을 지니고 있다. 돌팔매를 맞더라도 저자거리 한복판에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작가 이외수. 그를 강원도 화천군 다목리 감성마을에서 만났다. 그는 살아온 날들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았다.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꼰대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그는 "이곳에서는 하늘의 별들이 인간보다 더 영악하게 빛난다"며 웃었다.

―3년 전 암수술 하신 건 어떠신지. ▷몸 때문에 고생했어요. 위암 수술하고 나니까 폐기흉까지 와서 이중으로 힘들었죠. 암수술하고 술이 너무 약해졌어요. 와인 한두 잔 정도가 적정 주량이에요. 얼마 전 상처받은 일이 있어서 홧김에 와인 네 병인가 먹고 응급실까지 갔죠.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셔서 화제가 됐던데. ▷제의가 왔을 때 '살림하는 남자들'이라는 콘셉트가 마음에 들어서 나가게 됐죠. 요즘 집사람 건강이 안 좋아요. 그래서 내가 간식거리라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도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전기밥솥 뚜껑 여는 데 10분이 걸렸어요. 그래도 진심으로 하는 행동이 느껴졌는지 시청자들이 좋아하더라고요(작가는 최근 KBS 2TV '살림하는 남자들 2'에 출연해 '살림 신생아'라는 별명을 얻으며 큰 관심을 받았다).

―방송에서 젊은 날 사모님께 잘못했던 걸 많이 반성하셨던데. ▷다 술이 문제였죠. 엄청 마셨어요. 알코올중독으로 산 기간만 13년 정도였어요. 젊은 시절 술 때문에 즉결재판만 54번 받았어요. 그랬으니 얼마나 아내가 속이 터졌겠어요. 후회가 되죠. 술로 맺은 의리는 의리도 아니더라고요. 술친구는 술이 깨면 사라지고 없죠. 술로 쌓은 건 결국 다 허무해요. 아무래도 유전자에 기인적 기질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인데 벼슬 싫어하고 형식 싫어하는 걸 보면.

―그래도 그 와중에 소설을 쓰셨네요. ▷사람들은 제가 기인 행세만 하고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할 일은 다 했어요. 월부 책장사도 했고, 페인트공도 해봤고, 학원강사도 했어요. 등단을 하게 된 것도 밀린 방세를 갚으려고 소설을 써서 응모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그는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견습어린이들'이 당선되고, 1975년 '세대' 잡지 문예현상공모에서 중편소설 '훈장'으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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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셨죠. ▷네 그랬어요. 춘천교대에 다닐 때만 해도 화가의 길을 걷고 싶었는데 친구인 최돈선 시인이 글 쓰는 걸 보면서 문학으로 전향했어요. 그 친구가 등단 3관왕인가를 했는데, 그걸 보면서 '야, 이건 물감 값도 안 들고 돈이 필요 없는 일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부터 원고지 한 다발을 얻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제가 등단할 때 심사하신 분이 김동리 선생이었는데 심사평에 "서툴고 어린 감은 있으나 장차 개성 있는 작가로 성장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어요. 심사평을 읽고 어린 마음에 '무조건 개성 있는 작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문단 시스템을 거부하신 건가요. ▷사실 저는 '듣보잡' 작가였잖아요. 교대 중퇴에 강원도에 처박혀 있으니 신인문학상을 받았는데도 원고 청탁조차 없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문단도 결국 학연이니 지연이니 해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동네더군요. 그래서 독립 선언을 했죠. 벽에다 써붙였어요. 나(작가)와 출판사와 독자, 이렇게 삼각 구도만으로 책을 내겠다고. 40년 동안 그래왔어요. 어떤 문학단체, 어떤 집단과도 영합하지 않았죠. 지금도 문학단체에서 부르면 안 가지만 독자들이 부르는 곳에는 가죠.

―SNS를 많이 하시는 것도 독자를 직접 상대하는 일의 일환인가요. ▷난 SNS가 좋아요. 계급장 떼고 평등하게 사람을 만나잖아요. SNS에는 나이도 빈부도 직업도 작용하지 않아요. SNS 아니면 제가 어떻게 경상도에 사는 10대 소년이나, LA에 사는 교포 할머니와 대화해보겠어요.

―폴로어가 엄청 많으시죠.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패널, 폴라(네이버 SNS) 다 합해서 260만명 정도 돼요. 그러다 보니 제 발언을 오해하는 분들도 있고, 제 발언이 완전 다르게 왜곡되거나 침소봉대되는 경우도 많죠. 일종의 부작용인데 현대사회가 안고 가야 할 짐 같아요.

―SNS를 통해 시국 관련 발언도 많이 하셨는데. ▷MB 때도 그랬고 박근혜정부 때도 그랬고 돌직구를 많이 날렸죠. 난 정파나 이념에는 두드러기가 나는 사람이에요. 부정부패나 비상식적인 일들이 싫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제 발언을 정치적 등식 위에 올려놓고 재단을 했어요. '종북좌빨' 이야기도 듣고요. 그래서 이런저런 불이익도 받았죠. 거의 성사가 다 됐던 일들이 아무 이유 없이 무산되는 건 부지기수였죠.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갑자기 중단됐었죠. 박근혜정부 시절에는 사찰 대상이었더군요. 박근혜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저를 찾아오기도 했었어요. 그 자리에서 제가 문화예술계 지원을 간곡하게 부탁했었는데 블랙리스트다 뭐다 해서 정반대로 갔으니 참 서글퍼요.

―'종북좌빨' 이야기 들으면 어떠세요. ▷참 어이가 없었죠. 제 아버지는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돼 계세요. 저도 김신조가 넘어온 시대에 갑자기 군 복무가 연장된 '지옥군번'이었고, 제 아들 둘 다 군대를 필했어요.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씩 화천 인근 군부대에 가서 정신교육도 하고 있어요. 6년째 세계평화안보문학축전이라는 행사도 주관하고 있어요. 저는 반공주의자예요. 저를 보고 '종북좌빨'이라고 하는 건 정치적 모리배들의 임기응변식 보복이에요.

―올해 초 정권교체를 어떻게 보셨어요. ▷촛불시위를 퍼포먼스라고 봤어요. 촛불은 다분히 상징적이에요. 파라핀이라는 물질적인 몸체와, 의지와 정신을 상징하는 심지, 그리고 영혼을 상징하는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촛불은 어둠 속에 갇혀 있거나 소외되어 있는 것들을 끌어내 빛의 세계로 드러내는 역할을 해요. 올바른 정치를 향한 숨겨진 열망이 촛불을 통해 밖으로 나온 것이죠.

―문재인 대통령과 인연은 없으신지. ▷특별한 인연은 없지만 북콘서트를 하실 때마다 저를 초청하셨어요. 지난번 '운명' 때도 그랬고, 이번에 나온 '대한민국이 묻는다' 북콘서트 때도 제게 출연 요청을 하셨어요.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분인 것 같았어요. 책도 좋아하시고.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생각해보니 모두 글과 연관되어 있네요. 문단에 데뷔했을 때 가장 기뻤어요. '내가 작가가 됐다'는 생각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죠. 그리고 글 쓰면서 독자들의 동의를 얻을 때 기뻤어요. 편지를 하거나 찾아와서 "당신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고백을 할 때 행복했어요.

3년 전 암수술을 한 작가 이외수는 "이젠 필생의 대표작"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감성마을에서는 별들이 영악할 정도로 밝게 빛난다"며 웃었다. [김재훈 기자]
3년 전 암수술을 한 작가 이외수는 "이젠 필생의 대표작"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감성마을에서는 별들이 영악할 정도로 밝게 빛난다"며 웃었다. [김재훈 기자]
―가장 불행했던 때는. ▷사실 과거는 돌아보면 다 슬프죠. 특히 어렸을 때와 청소년 시절 가장 슬펐죠. 아버님이 제 존재를 감추고 재혼을 해버렸어요. 그 이후 아버님은 거의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동냥밥 얻어먹으러 다니곤 했어요.

―그럼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죠. ▷40대 초반까지는 등단을 했어도 큰돈을 벌지는 못했어요. 살 만해진 건 '벽오금학도'가 밀리언셀러가 되면서부터였죠. 그 이전에 나온 '꿈꾸는 식물'이나 '들개'도 엄청난 베스트셀러였지만 출판사의 부실과 고의 부도 등으로 인세를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벽오금학도'가 제 운명을 바꿨죠. 5년이라는 시간을 두문불출하고 쓴 소설인데 서점에 깔릴 틈도 없이 인쇄소에서 바로 팔려나갈 정도로 엄청난 반응을 얻었어요. 그때 집이라는 것도 사고 자동차라는 것도 샀죠.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완전변태'라는 단편집이에요. 나오자마자 세월호라는 비극이 터져서 전혀 빛을 못 봤죠. 나라가 전부 가라앉은 것처럼 슬픈데 무슨 마케팅을 하겠어요. 출판사에 어떤 홍보나 마케팅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 단편집에 제가 지금 살고 있는 화천을 소재로 한 '파로호'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요. 그 작품이 사장된 게 너무 안타까워요. 지금 다시 읽어봐도 섬뜩할 정도로 감성이 제대로 담긴 소설이에요.

―어떤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나요. ▷너무 많아요. 국내에선 이범선, 김동인 같은 작가를 좋아했죠. 해외로는 고골, 고리키, 헤세, 카뮈를 좋아했어요. 저는 화가들로부터 영감도 많이 얻었는데 클림트의 감성과 고흐의 열정을 따라 하고 싶었어요(답변을 하면서 그는 감흥에 젖은 채 박목월과 박재심의 시를 음송했다).

―예술과 정치는 어떤 관계일까요. ▷참 어려운 문제인데 저는 기본적으로 예술가는 예술 활동만으로 평가했으면 좋겠어요. 예술가를 그의 정치적 행적이나 이념으로 재단하는 건 안 된다고 봐요. 예술가는 작품으로 평가해야죠.

―화천 감성마을에 들어오신 지는 얼마나 됐는지. ▷11년 됐어요. 여기는 정말 달빛 청정구역이에요. 밤이면 달빛이 영악스러울 정도로 찬란하고, 유난히 밝은 날은 달빛에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예요.

―이외수가 아방궁에 산다는 오해도 있었잖아요. ▷보셨다시피 경치가 좋기는 하지만 아방궁은 아니잖아요. 작은 살림살이 공간과 작업실이 있고, 나머지는 행사를 열거나 방문객이 드나드는 공적 공간이 대부분이죠. 그리고 이곳이 제 개인 소유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곳은 화천군 소유예요. 저는 여기서 글 쓰고 강연하고 독자들 만나면서 재능기부식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고요.

―강원도가 고향도 아닌데 애착을 갖는 이유는. ▷일반인들에게는 태어난 곳이 고향일지 모르지만, 도인들에게는 깨달은 곳이 고향이고, 작가는 글을 쓴 자리가 바로 고향이에요. 그러니 강원도가 제 고향이죠. 춘천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썼고, 화천에서 제 후기 대표작들을 전부 썼으니까요. 제 글의 모든 정서는 강원도의 자연에서 얻은 감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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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통해 강원도 농산물도 많아 파시던데. ▷많이 팔았어요. 2010년 구제역 때문에 화천 산천어 축제가 취소됐을 때 창고에 엄청난 농산물이 쌓여 있었어요. 그때 15억원어치가 팔려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죠. 배추 파동이 났을 때도 나섰는데 그땐 화천 배추가 '완판'됐죠. 멜론 5000박스도 팔았고, 고로쇠 수액 1600병도 팔아봤고, 도루묵 8000상자도 팔았어요(웃음).

―이외수가 판매액의 몇 퍼센트를 갖는다는 등 소문도 있었잖아요. ▷배추를 팔면 배추 몇 포기를 받고, 고로쇠를 팔면 고로쇠 수액을 몇 병 받는 게 전부였어요. 그게 광고료라면 광고료겠지만 글쎄요 판매액의 몇 퍼센트나 됐을까요. 선의를 선의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몇 년 전에 모 치킨 회사와 함께 기부 캠페인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한 달에 몇 번 트위터에 회사 이름을 노출해주는 조건으로 강원도 6개 지자체에 각각 1000만원씩 6000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중단됐죠. 한 국회의원이 "이외수가 트위터로 돈벌이한다"고 주장하고 나서자 업체가 부담을 느꼈던 거죠.

―이번주에 산문집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는 방'이 출간됐죠. ▷험난한 인생을 사랑으로 버텨내라는 다부진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 매일매일 일기를 쓰듯이 쓴 글들과 정태련 화백의 그림이 잘 어울려요. 제가 혼자만의 골방에서 했던 생각들과 솔직한 고백이 읽을 만해요. 한 명의 독자라도 서점으로 더 오게끔 한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가족들 이야기 좀 해주세요. ▷아들이 둘 있는데 큰아들은 영화 일을 해요. '암살' 조감독을 했어요. '덕혜옹주'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고. 자기 작품 입봉 준비를 하고 있어요. '보복대행전문 주식회사'를 그녀석이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모르겠네요. 둘째는 문화 공간 기획 일을 하고 있어요. 서울 은평구 셋이서문학관과 이곳 이외수문학관을 디스플레이했죠. 그런데 이 녀석들이 아이를 안 낳아요. 지금 아내가 앓고 있는 병들도 손자만 안겨주면 다 나을 텐데(웃음).

―한국 사회를 어떻게 진단하시나요. ▷낙관적으로 보는 편이에요. 한국인들, 참 특이한 데가 있어요. 외국인들이 한국인은 세 가지를 모르고 산다고 하잖아요. 자기들이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를 모르고, 자기들이 (북한과의 대치라는)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살고 있는지 모르고, 자기들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힘겹게 버티고 있는지 모른 채 살고 있다고. 그런 와중에도 K팝이 세계를 휩쓸고, 세계 최고의 공산품을 만들어내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을 교체하고…. 참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자꾸 정신적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우려스러워요. 온 나라가 '먹방천국'이 된 거 같아요. 비만공화국이 되고 있어요. 정신은 갈수록 빈약해지는데 말이죠. 그 문제를 사회적으로 고민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정신이 빈약해지만 사회가 불행에 빠지거든요.

―소원이 있으시다면. ▷대표작을 하나 쓰고 싶어요. 오행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요. 물 같은 사람, 불같은 사람, 나무 같은 사람, 쇠 같은 사람, 흙 같은 사람 이렇게 다섯 부류의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죠. 굉장히 새로운 철학소설이 될 거예요.

■ 이외수는… 1946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강원도 인제에서 성장했다. 인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교육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소설가의 길을 걸었다. 1973년 '세대'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꿈꾸는 식물' '들개'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보복대행전문 주식회사' 등 소설과 '감성사전' '하악하악' 등 산문집을 내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밀리언셀러 작가로 자리 잡았다. 260만명의 폴로어를 거느리고 있어 'SNS 대통령'이라는 별칭을 듣기도 한다. 현재 강원도 화천군 다목리 감성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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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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